킹덤오브헤븐 - director's cut
감독 : 리들리 스콧
주연 : 올랜드블룸, 에바그린 , 제레미 아이언스...
극장에서 봤을때 이야기의 전개가 별로 매끄럽지 못하고 앞뒤가 좀 맞지 않아 스토리가 엉성하고 지겹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다 얼마전 dvd샵에서 이 디렉터컷 dvd를 발견했다. 디스크 4장에 총 서플타임 9시간 ㅡㅡ;;;;;
도대체 얼마를 잘라 먹은 것이냐 !!! 대략 감상해보니 극장에서 상영한것은 1시간 조금더 잘라 버린것이다.
비운의왕 볼드윈4세 , 자신의 아들을 죽일수 밖에 없었던 실비아의 운명등 안타깝지만 극장판에서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이해가 안되었던 내용이 디렉터컷을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이 영화의 명대사는 '예루살렘이 뭐냐'는 발리안의 질문에 대한 살라딘의 대답
Nothing... Everything...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한 곳,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 '킹덤 오브 헤븐'
나병환자인 볼드윈4세 실제 역사상에서도 13세에 왕위에 즉위 나병으로 17세때(16세인지 17세인지 정확하지 않음 ) 십자군을 이끌고 출정 한때 살라딘을 거의 잡을뻔했었던 왕으로 명장에 명군으로 그가 건강했었다면 예루살렘을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20대의 한창나이에 나병으로 죽게된다.
극중에서 저렇게 가면을 쓴 모습과 죽음후 일그러진 얼굴을 단 한번 보여주게 되지만 에드워드 노튼의 목소리와 카리스마는 영화속 캐릭터중에 최고였다.
단지 침대에 누워있거나 그런모습 뿐이었지만 단순한 목소리만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느끼게 해준 캐릭터.
글라디에이터만큼의 스펙타클한 영화는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둔 전투장면과 이야기전개
이영화를 극장에서만 봤다면 디렉터컷을 다시한번 보기를 권하면서...........
아래는 네이버및 인터넷 검색에서 발췌해 온글입니다...
1. 발리앙(Balian d'Ibelin)은 정말로 대장장이였나?
그가 프랑스에서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건너온 건 다분히 감독의 상상력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라틴 왕국의 귀족이었고, 아버지 이름도 고프리가 아니라 바리산(Barisan)이었다 - 그의 원래 이름도 Barisan이었으나 훗날 Balian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생년도는 알 수 없지만 1177년에 결혼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예루살렘 공방전이 벌어진 1187년에는 30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인은 예루살렘 왕 보두앙 4세의 선왕인 알마릭 1세의 미망인(후처였음)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하틴 전투에 빠지고 예루살렘을 수비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도 하틴 전투에 참가했고 후방의 기사단을 지휘했다 - 물론 그와 레몽(영화에서는 티베리아스)은 이 전투에 반대했었다. 하틴에서 패한 후 발리앙은 레몽과 함께 티레로 퇴각하였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발리앙은 가족이 안전한지 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하루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살라딘에게 호소하였고, 자비로운 살라딘은 이를 허락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백성들이 그에게 지휘를 맡아달라고 간청하니, 기사도에 투철한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자신의 약속을 어기게 해달라고 한 번 더 호소하였고, 관대한 살라딘은 이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살라딘에 대항하여 이틀 동안 공방전을 지휘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수많은 백성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60명의 고귀한 자제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을 뿐이며 당시 예루살렘에는 1만명의 무장 병사가 있었다.
또한 영화에서 그는 프랑스로 돌아간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라틴 왕국에 남았고 계속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193년 사자왕 리차드와 살라딘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도록 노력하였고, 전쟁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2. 시빌라와 기
시빌라는 영화에서와는 아주 딴판인 상당한 요부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녀는 1160년생이었고 1176년에 야파와 아스칼론의 영주 윌리엄과 결혼하였다. 이듬해 윌리엄은 사망하였고, 그녀는 아들 보두앙 5세를 낳았다. 이때 이벨린의 발리앙 가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가문과 재혼하기를 촉구하였으나, 시빌나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온 기와 재혼하고 두 딸을 낳았다 - 영화에서는 이 역사적 사실을 발리앙의 러브 스토리와 결부시켰다.
1186년 보두앙 4세가 영화에서처럼 문둥병으로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기가 아니라 시빌라의 아들 보두앙 5세였다. 이때 보두앙 5세는 겨우 7살이었고, 그를 왕위에 옹립한 사람은 바로 기사도의 정신, 예루살렘의 수비대장 이벨린의 발리앙이었다. 하지만 보두앙 5세 역시 1187년 사망하자, 결국 기가 예루살렘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시빌라는 영화에서처럼 발리앙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기가 살라딘으로부터 석방된 후 함께 티레로 들어갔으며 3차 십자군이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서 농성하였다. 그녀는 1190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기는 프랑스에 있는 영국령 아키텐(현재의 브르타뉴)에서 날리던 건달 귀족이었다. 당시 아키텐의 왕자 리차드(곧 영국왕 사자왕 리차드가 된다)는 기의 만행을 참지 못하고 그를 추방하였고, 기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후 시빌라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리 전쟁에 능하지도 못했고 용기도 없었던 그가 시빌라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잘생긴 얼굴 덕분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영화에서 그는 성전기사단을 지휘하는 것으로 그려졌으나 실제로 성전기사단을 지휘한 사람은 제라르 드 리드포르라는 악랄하고 무모한 기사였다.
1187년 보두앙 5세가 급사한 후 기는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으나, 원채 무능하였던 탓에 발리앙과 레몽의 조언을 무시하고 하틴 전투를 일으켰고 대파당하여 포로로 잡혔다. 살라딘은 그를 석방하였고, 기는 티레로 피신하여 왕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사자왕 리차드가 이끄는 3차 십자군이 상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빌라가 죽자, 그의 왕위는 위태로워졌고, 결국 왕위는 몽페르의 후작을 거쳐 앙리에게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리차드와 합작하여 키프로스로 건너가 그곳의 왕이 되었고, 이후 키프로스에서는 300년 가까이 기의 왕가가 이어졌다.
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티베리아스는 티베리아스의 성주 레몽 3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티베리아스의 훌륭한 영주였고, 발리앙과 함께 기사 중의 기사였으며, 살라딘의 친구였다. 영화에서처럼 진지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불행히도 3차 십자군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영화에서 보듯이 케라크의 성주 샤티용의 레지날드가 살라딘의 누이가 포함된 캐러번을 습격하자, 살라딘은 케라크를 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군대가 티베리아스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레몽에게 요청했다(마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길을 열어달라고 한 것처럼). 이에 레몽은 살라딘의 군대가 해 뜨고 나서 들어와 해 지기 전에 나가면 괜찮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실제로 살라딘의 군대 7천명이 티베리아스에 들어와 돌아다니자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연합하여 이를 공격하였고 -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수는 겨우 240명에 지나지 않았다 - 당연히 기사단은 전멸당하였다. 살라딘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 티베리아스를 함락시킨다.
예루살렘에 와 있던 레몽은 자신의 영지가 함락되었음에도 전면전은 안 된다고 설파하지만, 겁쟁이로 불리는 데 진력이 나 있던 기 왕은 샤티용과 제라르의 말을 듣고 2만명의 군대로 진군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병력은 물이 없어서 하틴에서 전멸 당하고, 레몽은 패잔병을 이끌고 티레로 퇴각하였다. 영화에서 그는 키프로스로 떠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 해 1187년에 티레에서 사망하였다.
4. 예루살렘 공방전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다가오자마자 바로 공성전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6일 동안 정찰한 다음 7일째 되던 날 공격을 감행했다. 영화에서처럼 투석기 등이 대거 동원되었고, 9일째 되던 날 한쪽 벽이 허물어졌다. 이 벽은 1차 십자군 전쟁 당시 부용의 고드푸르와가 허물었던 바로 그 벽이다.
이 시점에서 발리앙은 협상을 시도하였고, 살라딘은 처음에는 협상에 응하지 않으려다 본래의 자비로운 성격을 숨기지 못하고 결국 협상에 응하였다. 영화에서처럼 모든 기독교인이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살라딘은 비기독교인(유대인 포함)은 모두 석방하였지만, 기독교인은 돈을 내야 석방한다는 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돈이 있는 기독교인은 모두 석방되었고, 빈민들은 발리앙이 사재를 털고 예루살렘 대주교가 구호 성금 3만 디나르를 내서 대부분 석방하였다. 살라딘의 자비로운 동생 역시 이 대열에 참가하여 자신의 전공에 대한 대가로 1천명을 노예로 요구한 후 그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8천명의 기독교인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였다. 살라딘은 이 8천명도 석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멍청한' 백성이 돈을 빼돌리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 생각을 철회하였다.
이에 발리앙이 그 8천명과 자신을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살라딘은 거기까지 응하지는 않았고, 결국 8천명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때 살라딘을 진노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대주교가 무려 20만 디나르를 빼돌린 것이다. 그 정도는 그 8천명을 석방하고도 남을 돈이었는데도 대주교가 자신의 신도들을 버렸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라딘은 지극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5. 마지막 장면에서 영국왕 리차드가 왜 프랑스 땅을 지나갔나?
당시 프랑스에서 아키텐과 노르망디 두 지역은 영국령이었다. 리차드는 아키텐의 왕자로서 영국의 왕이 되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는 3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영국을 동생 존에게 맡긴 후 영국과 아키텐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건너갔다.
살라딘이 전쟁의 천재였다면, 리차드는 전쟁의 신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살라딘이었지만 리차드를 감당해낼 수는 없어서 전면전을 벌였던 2차 하틴 전투(또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대파당하였다. 그는 1차 하틴 전투와 마찬가지로 지공을 벌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모든 도시와 우물을 없애버렸다. 그토록 용감한 리차드였으나 살라딘의 초토화 전술을 당해내지는 못하고 결국 예루살렘 앞에서 회군하고 말았다.
1193년 리차드와 살라딘은 강화 조약을 맺었고, 리차드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리차드는 어줍잖은 이유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 동안 영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인 동방 원정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느라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야했고, 결국 로빈후드가 반역을 일으키는 등 귀족들의 항명이 잇달아 일어나 '마그나카르타'를 체결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인리히가 요구한 리차드의 몸값은 영국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돌아온 리차드는 존을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일으켜야했고, 왕위를 되찾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한편 살라딘은 그 천재적 통치 능력과 전쟁 솜씨 외에도 자비심과 관대함으로 유명하였는데, 정작 그 자신은 돈이 없었다. 그가 1194년 사망한 후에는 무덤을 지을 돈도 없어서 지인들이 돈을 빌리러 다녀야했을 정도였다. 3차 십자군 전쟁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에 세종대왕을 더한 정도라고 할만하다. 8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살라딘은 아랍권에서 제일의 영웅이며 성군이다.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dts 4disc) - 리들리 스코트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외 출연/20세기 폭스 |
'지구별여행 > cul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드] 문라이트 - Moonlight (뱀파이어 이야기) (0) | 2007.11.13 |
---|---|
[캐릭터 비교] 태왕사신기의 처로 vs 킹덤오브헤븐 볼드윈4세 (0) | 2007.11.01 |
쿠엔틴 타란티노 - 데쓰프루프 (Death Proof) (0) | 2007.10.18 |